우리 둘째 100일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원래는 7월 4일이 100일인데 금요일이라 한주 당겨서 6월 29일(일)날 100일 잔치를 했습니다. 말이 100일 잔치이지 특별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식구들 먹을 만큼만 세 종류의 떡을 만들고 아이 목에 명주실 한 번 걸어주고, 그게 100일 잔치입니다. 100일 잔치 떡은 100사람이 나눠먹어야 좋다는데 이거 30인분도 안 되니 누구 나눠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아이 100일이라는 이유로 시골 부모님 한 번 더 찾아뵙는 거지요. 손꼽아 기다리시기도 하구요. 100일 하러 갔다가 이것 저것 챙겨오기만 했습니다. 자동차는 미어 터질 지경인데 이것저것 더 챙겨주시느라 여념이 없는 부모님 모습.
올라올 시간이 다 됐는데 그제야 할아버지 품에서 벙글벙글 웃고 있는 아기. 할아버지가 무뚝뚝하셔서 손자손녀들을 거의 안아주지 않거든요. 손자 손녀가 그렇게 많은데도 말이죠. 시간 많을 때 안아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며 올라왔습니다.
100일 잔치 전 과정을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종종 시골의 정겨운 풍경도 나옵니다. 있는 그대로를 담았습니다. 아기에게 할머니 젖을 먹이려는 모습 등 소박함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그래서 이 동영상 타이틀을 ‘휴먼 다큐’로 칭하기로 했습니다. 지금부터 정겨운 시골풍경과 시골 부모님의 마음을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봐주세요. 특히 맨 마지막 부분 말이죠. 시골이 고향이 분들, 마치 독자 여러분 부모님, 엄마 같다는 생각 들지 않으세요? 이 영상 보시고 시골 부모님께 전화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큰형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동생들에게 단체로 보내는 문자였습니다. 문자의 내용인 즉 시골에 계신 엄마가 휴대폰을 구입하셨으니 기념으로 ‘개통 전화’ 한통씩 해드리라는 것입니다. 통신회사에 다니는 큰형이 휴대폰을 개통해 드린 것입니다.
올해 67세 되시고 농사짓고 계신 엄마에게 왜 휴대폰이 필요할까? 꿈에도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엄마의 휴대폰 개통 사실은 제게 있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국민학교조차 못 나오시어 어깨너머로 한글 깨우치신 바람에 엄마는 사실 기계치십니다. 이제는 눈도 잘 안보여 폰번호 누르기도 벅찬 시골 할머니가 다 되신 엄마께서 어떤 경우에 휴대폰을 사용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논 밭에 계시기 때문에 도회지 자식들이 전화를 해도 아침 점심 저녁 시간에 맞춰 유선전화를 드리고 있지요. 논 밭에 휴대폰을 들고 나가 일하실만큼 급한 일도 없구요. 읍내 시장은 한달에 한번 나가실까 말까 합니다. 막내 동생이 시골에서 단위 농협에 다니고 있기에 필요한게 있으면 막내가 다 사들고 들어옵니다. 큰형도 시골집에서 10분 거리에 살고 있고요.
이상은 시골 엄마께 굳이 휴대폰이 필요치 않은 이유를 여러 가지 면에서 들어본 것입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제 생각이었구요. 엄마 입장에서 휴대폰이 필요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제 엄마와 이런 내용으로 휴대폰 통화를 했습니다.
“엄마, 휴대폰 사셨다매?”
“(헤헤 웃으시며) 잉, 근디 어떻게 알고 전화했냐?”
“큰형이 알려줘서, 근데 왜 갑자기 휴대폰 사셨대? 어디에 쓰려고?”
“우리 동네에서 휴대폰 없는 이 나밖에 읍써, 몇백년 살 것도 아니고 넘들 허는거 다 허고 살아야지.”
그렇습니다. 저녁 마실 마을회관(말은 회관인데 기능은 노인정)으로 가면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할머니가 된 동네 아주머니들이 휴대폰을 갖고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엄마는 소외감을 느끼신 거구요.
단지 혼자만 갖고 있지 않다는 소외감 때문은 아닌 것 같구요. 내면을 보자면 자식들이 그깟 휴대폰 하나씩은 다 해주는데 ‘누구누구네가 휴대폰 없다’고 하면 ‘그집 자식들은 아직까지 뭐 하는 것이냐?’하는 식으로 분위기가 몰리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니 휴대폰의 필요성 보다는 그것이 자식 자랑의 기준 같은게 되는 것이지요. 연로하신 시골 분들이 원래 그렇습니다. 노인정에 모여 자식자랑 하시는게 엄청난 낙이라는 사실 말이지요.
그런데 엄마께서 좀 헷갈리시는 듯 합니다. 아버지의 휴대폰에는 단축번호가 설정돼 있습니다. 1번은 큰누나, 2번은 큰형, 3번은 작은누나, 4번은 작은형, 5번은 바로 저구요, 6번은 막내동생이었어지요. 즉 둘째하고 통화하고 싶으면 2, 넷째하고 통화하고 싶으면 4를 누르는 등 몇째 자식인지 생각만 하면 어렵지 않게 통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엄마 휴대폰에 1번 단축번호가 아버지로 저장돼 있고 자식들은 모두 번호 1개씩 뒤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즉 엄마 휴대폰에서는 2번을 누르면 둘째 아들이 나오는게 아니고 첫째가 연결되도록 번호가 저장된 것이지요. 엄마는 그게 너무나 헷갈린다고 아버지 휴대폰처럼 자식들 서열순서대로 번호를 입력해달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번호를 7번에 입력하면 된다고 하시면서 말이지요.
여하튼 휴대폰 때문에 기뻐하시는 엄마를 보니 저도 흐뭇해집니다. 그것이 얼마나 쓸모있냐를 따지는게 아니라 휴대폰 소유라는 자체가 엄마께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휴대폰이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가 되지 않도록 종종 휴대폰으로 전화 드려야겠습니다.
오랫만에 고향 시골을 찾았습니다. 눈이 많이 와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빙판길이 돼 있었습니다. 큰길은 차가 다녀 녹았는데 역시 동네 길은 여전히 얼어붙었습니다. 살살 기어가다시피 해서 집에 들어갔지요.
제법 눈발이 날렸습니다. 눈이 날리니 조카들은 신이 난 듯했습니다. 시골집 앞에는 작은 언덕이 있습니다. 30미터 정도 되는데요. 30년 전 눈만 오면 비료 포대에 지푸라기를 넣어 비닐 썰매를 만들어 놀던 생각이 납니다. 언덕이 반질반질한 얼음으로 변할 때까지 미끄럼을 타고 놀던 그 시절, 벌써 30년 전 일이네요.
30년 전 그 시골 언덕길에서 이제는 조카들이 비니루 포대를 타고 놉니다. 막내 동생(아이들한테는 삼촌)이 조카들을 위해 비니루 썰매를 준비하고 눈이 녹은 곳에는 눈을 퍼 날라다 매끄럽게 만듭니다. 아마 동생도 조카들에게 비니루 포대를 만들어주고 미끄럼길을 만들면서 어릴 적 추억을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비록 멋진 눈썰매장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어린 시절 추억이 그대로 담겨있는 풍경을 자식들, 조카들에게 보여주게 돼 마음이 훈훈하기까지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골 언덕에서 신나게 비니루 타고 노는 조카들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감상하며 그 아득한 추억 속으로 빠져보겠습니다.
시골에서 김장을 하고 오늘(25일) 12시 성남에 도착했습니다. 여섯집 김장 200포기 넘게 했으니 결코 적지 않은 양입니다. 연세는 66세지만 얼굴이나 몸의 기능으로 볼 때 여든은 넘는 우리 어머니 고생 많으셨지요. 새벽 4시부터 일어나셔서 자식들 가져갈 것 이것저것 챙기시는 어머니....도회지에서 직장다니고 시골이 고향인 분들은 늘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김치를 비롯해 이것저것 얼마나 많이 실었는지 차가 뒤뚱뒤뚱, 밟아도 밟아도 속도는 느껴지지 않고 육중한 무게감만 감도는 자동차. 자식들 차가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작은 점이 되어 뒷마당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어머니를 멀리하고 도시의 일상으로 그렇게 돌아왔습니다.
김치 냉장고에 김치 넣고, 베란다에 갈 것, 옥상에 올라갈 것 등등을 분류하며 짐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래기국 끓여먹으려고 가져온 무청(무이파리)보자기를 푸는 순간, 앗! 시퍼런 무청과 함께 드러난 시퍼런 배춧잎 다섯장.... 만원짜리 다섯장이 무청속에 끼어 있었습니다.
시골을 떠나오기 바로 직전 아내가 어머니께 용돈 10만원을 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무청속에 5만원을 되돌려 보내신 겁니다. 아, 이번이 몇번째인가? 한번은 손자 호주머니속에 10만원을, 또 한번은 아내 가방속에 드렸던 돈 10만원을 몰래 넣어 돌려주셨습니다. 그냥 돌려주시면 안받을 걸 뻔히 알고 계시기에....
무청과 뒤섞인 돈을 보며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바로 전화를 드려 잘 도착했음과 동시에 왜 그러셨냐고 묻자...
"니덜이나 잘 살어. 니덜도 힘들게 살면서 무슨 용돈을 주고 그랴. 지금은 에미 돈 필요 없응깨, 나중에 돈 많이 벌고 에미 더 늙거덩 용돈 줘도 뎌..."
어째 이런일이... 한 두번도 아니고 이번이 세번째라니...게다가 더 늙으면 용돈을 달라하시니...지금도 80은 훨씬 넘어보이는 얼굴과 몸 상태인데...우리 어머니도 참내~~~
7일(수) 오후 다섯시 반, 경기도 성남의 한 아파트 단지 담벼락 옆을 지나가는데 할머니들이 맨땅에 좌판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콩, 은행, 냉이, 토란, 깐마늘, 고구마 등을 팔고 계신다. 열심히 마늘을 까 소쿠리에 얹어 놓으신다.
앗, 그런데 푸릇푸릇한 냉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된장찌개에 넣어 먹으면 푸릇푸릇한 냉이향이 좋겠지 생각했다.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나, 대뜸 쭈그리고 앉아 얼마냐고 물었다. 한소쿠리에 2천원이란다. 물론 한소쿠리 밖에 없다.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푸릇푸릇한 냉이를 본지가 한참이라 맛난 된장찌개를 먹을 생각으로 2천원 주고 샀다.
“그런데 할머니, 이 냉이는 어디서 나신 거에요?”
“저기에서 캐온 거유.”
그렇다. 할머니는 냉이를 공원같은 흙이 있는 곳에서 손수 캐셨다. 그리고 은행은 길거리 지나다가 주워서 이 좌판에 펼쳐놓은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달랑 한소쿠리인 고구마는 어디서 났을까? 며느리가 고구마 한 박스를 사왔는데 썩을까봐 이렇게 가지고 나와 팔고 계신단다. 성남 모란장에서 사온것도 있고 손수 마련하신 것도 있다.
손수 캔 냉이, 길에서 주운 은행 등으로 좌판을 벌인 할머니.
하루 5천원, 잘되면 1만원 벌어
나는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와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가는 사람 중 한명이 희안한 듯 내 모습을 바라보며 한 마디 했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할머니 좌판에서 잘 안사는데 멀쩡하게 양복입은 젊은 남자가 냉이를 사 들고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할머니 하루에 얼마나 벌어요?”
“그냥 5천원, 잘 되는 날은 1만원도 벌유.”
이 할머니 연세는 올해 75세이다. 충남 아산에서 농사지으시다 몇 년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아들 내외가 있는 이곳 성남으로 올라오셨다. 평생을 농사 지으시다 갑갑한 아파트에 가만 앉아 있으려니 병이 날 지경. 그래서 이렇게 밖으로 나오신거란다.
하루에 5천원, 1만원 벌어 어떡하냐는 내 걱정에, 할머니는 “다 그렇지유.”라고 하신다. 돈 보다는 그냥 사람들 지나다는거 구경하고 이렇게 나와 있으면 치매도 예방된다고 하여 좌판을 벌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은근히 토란 5천원짜리를 3천원에 줄테니 들여가라는 할머니 모습에서 뭔지 모를 정감이 느껴졌다.
처음엔 자식들 반대, 지금은 긍정적으로 변해
이곳에 처음 좌판을 벌일때 아들, 며느리가 반대했다고 한다. 용돈을 안드리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면 아들 며느리 욕되게 하는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아들 며느리도 할머니의 고집을 끝내 꺾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가 괜스레 고마웠다. 이렇게 좌판을 벌이는 일이 자식들의 체면을 깎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할머니에게 삶의 희망과 살아가는 의미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농사꾼의 자식으로 살아왔고, 70이신 아버지도 많은 농사를 짓고 계신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답답한 아파트에서 살라고 하면 단 이틀을 못견디고 병이 나 돌아가실 분들이다. 시골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계신 도회지 자녀들은 그 심정 십분 이해할게다.
이 좌판 할머니 바로 옆(30미터)에 큰 상가도 있고, 종합, 재래 시장 다 있는데도 굳이 이 할머니에게 가서 비싸게 냉이를 사고 30여분 동안 말동무를 해 드린 이유가 있다. 좌판에 벌여놓은 농산물과 할머니의 모습을 봤을 때 얼핏 우리 어머니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또한 글과 사진을 통해 시골에 부모님이 계신 도회지 자녀들에게 뭔가를 일러주고 싶었다. 뭐를 일러주고 싶었냐하면,
지난 주말 고구마를 캐러 고향집인 충남 서산 시골에 다녀왔습니다. 토요일날 오전에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갔는데, 엄청 밀리더군요. 아는 사람 이야기 들어봤더니, 내장산 단풍 관광객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하더군요. 단풍 관광객 틈에 끼어 밀리는 자동차 대열에 끼어 그렇게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밀린 고속도로 운전에 뻐근한 몸을 이끌고 고구마 밭으로 갔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고구마 밭…이 많은 고구마 언제 캐냐며 그저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낫으로 고구마 줄기를 쳐 내고…아버지와 형의 얼굴에 땀방울이 주루룩….
줄기를 쳐내고 두둑이 나타나면 경운기로 살살 갈아엎습니다. 그리고는 쭈그려 앉아 고구마를 주워냅니다. 그런 다음 크기별로 분류해 자루에 담습니다. 땡볕은 내려쬐고…쭈그려 앉으니 무릎은 아프고 허벅지는 알이 베깁니다. 땡볕에 앉았다 일어서면 머리가 아찔아찔.. 주말농장 가서 재미로 고구마 캐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게 바로 땡볕에서의 고구마 캐는 작업이지요…
품값도 안나오는 고구마, 아버지는 왜 이리 많이 심으셨나?
그런데 고구마 가격이 얼마나 하냐구요? 제 동생이 농협에 근무해서 잘 알고 있는데, 한마디로 똥값이라고 합니다. 어느 부락에서 5톤 트럭에 한 차 싣고 서울로 갔다가 시세가 너무 낮아 그냥 싣고 도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가져온 고구마 뭐 할까요? 다 쪄먹을수도 없고, 짐승 줄 수도 없고…완전히 애물단지지요. 다들 고구마를 너무 많이 심어 가격이 폭락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왜 이리 많은 고구마를 심으셨을까요? 600평이 넘는 이 넓은 밭에…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두고 ‘징그러운 영감’이라며 투덜대십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장은 이해합니다. 70평생 흙에서 나서 자라 이 흙일을 해오신 아버지께서 이 밭에 고구마를 심지 않으셨다면, 아니 그 어떤 것이라도 심으셨을 겁니다. 돈이 안돼도, 아니 손해가 난다해도 멀쩡한 밭이 풀밭으로 변하는걸 눈뜨고는 못보고 계실 우리 아버지. 바로 농군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하튼 고구마 캐기 작업은 토요일 오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다섯명 식구가 작업을 했는데, 마저 작업을 못 마쳤습니다. 주말마다 도회지에 사는 자식들이 내려가 고구마를 캘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렇다고 돈 되는 고구마도 아니고…
주말 우리 가족이 캔 고구마는 10미터 지하 굴로 기약없이 내려갔습니다. 혹시나 겨울에 비싸지려나 하는 기대에서 말이지요. 그런데 그거 꺼내는 일도 장난이 아닙니다. 밧줄로 매달아 20미터 밖으로 끌어올리려면 온 몸이 녹초가 되고 말지요. 뭐 하나 쉬운게 없습니다.
서울 올라오는 길에 어머니께서 3만원 쥐어주시다
저녁 먹고 교통방송을 들으니 서울 올라가는 길은 여전히 막힙니다. 조금 쉬었다 밤 11시가 다 돼 올라가려고 하는데 어머니께서 3만원을 쥐어주십니다. 아기 과자나 사주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용돈을 드려도 시원치않을 판인데,어머니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말도 못하게 뻐근한 몸을 이끌도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일요일 밤 11시경, 서해안 고속도로 상행선 행담도 휴게소에서 서평택IC까지 11km 구간이 꼼짝을 안합니다. 지난 일요일 귀경 행렬은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돈도 안되는 고구마 캔다고 행락 인파에 묻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올라가는 서울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요?
그나저나 저 많은 고구마 부모님 둘이서 언제 캘 것이며, 애물단지 고구마 다 캐서 뭐하는데 쓸 건지 걱정이 되네요. 그거 생각하면 마음만 무겁습니다.
아마 고향이 시골이라 부모님께서 시골서 농사지으시고 현재 도회지에서 살고 계신 독자 여러분들이라면 이 마음 이해가 되겠지요?